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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그 주의 칼브에서 태어난 헤세는 매우 비범하여 3살이
지나자 벌써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조숙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. |
[헤세의 어머니 마리 헤세(19세 때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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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시인 아니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!"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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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당사자에게나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이따금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. 어린 시절부터 그의 내부에는 이상 야릇한 그 무엇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. 그것은 창조적인 광기, 이를테면 디어먼(악마)이었고, 문학으로서 하나의 출구를 찾기까지 헤르만의 내부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. 마음 한 곳의 울적한 응어리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 헤세가 자신과 어머니를 괴롭히고, 나아가서 선생님에게까지 충돌을 일으킨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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헤르만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희망 소년 헤르만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. 그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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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99년(21세)으로 접어들자 헤세는 의젓한 한 사람의 점원으로 성장했고, 책을 파는 신세에서 책을 쓰는 신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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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21세때의 헤세(1899)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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톨스토이와 러스킨에게 공명하여 전원생활을 보내고 싶었던 헤세 부부는 가까운 독일려의 한촌인 가이엔호펜의 어는 농가로 이주하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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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Castigione로 향하는 헤세와 Dthmar Schoeck (1911)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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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인도여행중에(중앙이 헤세,오른쪽은 Hans Sturzenegger)] |
헤세는 안락의 쾌감을 맛보는 한편 안락에 저항을 느끼게 되었다. 구속은 헤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. 헤세는 도처에서 초대를 받고 자작시를 낭독하면서 여행도 즐겼다. 방랑자로서의 그의 본바탕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. 부풀어오르는 여정을 억제할 길 없었던 그는 1911년 9월, 화가 슈츔첸에가와 함께 아시아 여행을 떠났다. 이 먼 여행의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, 유럽의 권태, 이를테면 유럽 문화에 대한 권태감과 안주에의 혐오에서 강행된 것이리라. 그는 귀국후 <인도에서>라는 작푸을 출간했다. 책이 출간되자 마자 날개 돋힌 듯이 팔려 순식간에 6판을 찍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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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사랑은 미움보다 크고 이해는 노염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."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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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림 그리는 일은 나의 마술도구이며 파우스트의 외투이다. 그림의 도움으로 나는 벌써 수 천번이나 마술을 부렸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."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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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내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, 현상세계에 푹 빠져서 완전히 내자신을 잊는 것은 귀중한 체험입니다."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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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5년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, 독일 양국에서 다투어 헤세의 책이 간행되어 꽃 피는 봄이
헤세에게 찾아들었다. 괴에테 상, 노벨 문학상에 이어 빌헬름 라베 상(1950), 독일 최고의
문화 훈장 '푸르 러 메리트' 등이 헤세에게 수여되었다
[노년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헤세] (왼쪽)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쟁에 광분하고 있을 대, 헤세는 몬테뇰라에서 <유리알 유희>라는
거작을 쓰기 시작했다. 한편에서는 피비린내나는 폭력에 의해 인도와 정신 문화가 짓밟히고 있는데, 헤세는
순수한 정신의 이상향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. [창밖을 바라보는 노년의 헤세] |
"오래도록 무거운 짐을 진 자, 그 짐을 부리도록 허락이 내린다. 그것은 감미롭고 근사한 일이다." -유리알 유희'에서
[헤세의 데드마스크(1962)] [헤세의 마지막 작품인 "꺾인 가지"(1962)의 수정본] 그는 숨진 바로 전날까지 소품 시 <꺾인 가지>의 시상에 머리를 짜고 있었다.
삶에 대한 집착도 없지는 않았지만 헤세는 시인으로 일관한 한평생을 살았다.... |